
현장에서 사고가 나면 늘 시공사가 먼저 도마에 오릅니다. 그런데 저는 일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위험의 씨앗이 설계단계에서 이미 뿌려진 건데, 왜 수확은 언제나 현장이 혼자 거두는 걸까. 그 구조적 불합리함이 오늘 이 글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위험은 공사 전부터 설계도면에 새겨진다
일반적으로 건설사고는 현장 관리 문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안전모 미착용, 안전난간 미설치, 현장소장의 부주의 같은 이야기가 뉴스에 반복되다 보니 그런 인식이 굳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국내외 선행연구들을 보면 중대재해의 약 45%가 기획·설계단계에서 이미 내재된 위험요인에서 비롯된다는 결론이 일관되게 나옵니다([출처: 안전저널]). 공사기간, 공법, 구조형식, 작업공간, 공정 간 간섭 같은 핵심 조건들이 모두 설계단계에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시공사가 현장에 들어올 때는 이미 판이 짜인 상태인 거죠.
여기서 설계안전성검토란, 설계 과정에서 시공 중 발생할 수 있는 위험요인을 사전에 식별하고 제거하거나 저감 하는 법적 절차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이 설계대로 지으면 나중에 어디서 다칠 수 있는지"를 미리 따져보는 작업입니다. 제도는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저는 실시설계가 두 달 넘게 지연된 프로젝트를 직접 겪었습니다. 착공을 서둘러야 하는 상황에서 설계사에게 독촉을 했더니 돌아온 말이 "우리도 돈을 받아야 일을 하지, 자원봉사를 할 순 없다"였습니다. 기본설계 단계에서 계약이 종료되거나 실시설계 수정 범위가 커지면서 추가 비용 협의가 안 되면 설계 자체가 멈춰버리는 겁니다. 그 사이에 공기는 흘러가고, 현장은 불완전한 설계를 들고 착공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이게 제가 직접 겪은 현실입니다.
서류는 갖춰져 있는데 왜 사고는 반복되는가
안전관리계획서, 작업계획서, 위험성평가. 현재 대부분의 건설현장에는 이 서류들이 모두 갖춰져 있습니다. 서류상으로만 보면 안전 관리 체계가 완비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중대재해는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위험성평가란, 작업 전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 파악하고 그 위험이 얼마나 심각한지 판단한 뒤 대책을 마련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제도 취지는 좋습니다. 문제는 이게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느냐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많은 현장에서 위험성평가는 제출용 서류에 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용노동부 산업재해 통계를 보면 건설업은 여전히 전체 산업재해 사망자 수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합니다(출처: 고용노동부). 서류는 완벽한데 사람은 계속 다칩니다. 이 간극이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간극을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적정공기 산출 방식입니다. 여기서 적정공기란, 수량산출서와 내역서를 바탕으로 공사를 무리 없이 완료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간을 산정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현행 방식에는 허점이 있습니다. 안전관리비는 총공사비의 일정 비율인 요율로 계상되다 보니, 안전시설물 설치와 해체에 걸리는 실제 기간이 공기 산정에 반영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공기를 맞추려면 안전시설물 관련 작업 시간을 어딘가에서 쥐어짜야 하는 구조가 됩니다. 현장에서 안전을 무시하는 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이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시공단계에서 실행력을 높이기 위해 실질적으로 필요한 개선 과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설계 조건 재검토 절차의 제도화: 착공 전 시공자가 설계 내용을 체계적으로 재검토하고 위험 요소를 확인하는 절차를 의무화해야 합니다.
- 공학적 안전조치 우선 원칙: 추락방지시설, 안전난간, 방호망 같은 구조적 설비를 통해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기본이어야 합니다. 개인의 주의에 의존하는 방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 고위험 작업 사전 승인 강화: TBM(Tool Box Meeting)이란 작업 전에 팀원들이 모여 당일 작업의 위험 요소를 공유하고 확인하는 안전 미팅을 말합니다. 이 과정이 형식적 점검이 아닌 실질적인 위험 통제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 안전시설물 설치·해체 비용의 내역서 반영: 요율로만 계상되는 현재 방식에서 벗어나, 실제 작업 시간과 비용을 내역서에 별도 항목으로 명시해야 합니다.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현장만 계속 희생된다
TBM이 있고, 안전교육이 있고, 위험성평가도 있습니다. 그런데 설계안전보건대장이 실효성 있게 운영되지 않는 구조에서는 현장 관리자가 아무리 애를 써도 한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설계안전보건대장이란, 설계단계에서 식별된 위험요인과 그 저감 방안을 기록한 문서로, 시공단계까지 이어져 관리되어야 하는 법적 서류를 말합니다. 취지는 좋지만 발주자와 설계사 간 계약 구조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면 그냥 서류 한 장에 그칩니다.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설계사와 발주자 간의 계약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설계와 실시설계가 사실상 분리된 계약 구조에서는, 설계사가 실시설계 단계에서 책임지고 수정할 유인이 없습니다. 계약이 끝났거나 추가 비용이 발생하면 그냥 멈춰버리는 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이 부분을 제도적으로 묶어두지 않으면 설계 품질은 올라가지 않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공 현장으로 떠넘겨집니다.
중대재해는 설계의 문제이자 현장의 책임이라는 두 가지가 동시에 성립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현장만 책임을 집니다. 이 불균형을 바로잡지 않는 한, 안전관리자 혼자 버티는 구조는 계속될 것입니다. 제도가 현실을 따라잡아야 현장이 버틸 수 있습니다.
이 글은 건설안전 분야에서의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법률적·전문적 안전 조언이 아닙니다. 현장별 상황에 따라 적용 방법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www.anjunj.com/news/articleView.html?idxno=418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