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력이 없어도 현장을 지도할 수 있는 자격증이 있다면 믿어지시겠습니까. 저는 현업에서 안전관리 업무를 하면서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꽤 오래 멈칫했습니다. 사업장의 안전보건 관리를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국가 자격인 산업안전보건지도사 얘기입니다. 최근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이 제도에 대한 개편 연구 용역에 착수하면서 오랫동안 쌓여온 문제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응시자격 없는 자격증, 이게 맞는 건가
일반적으로 국가 자격시험은 일정 수준 이상의 학력이나 경력을 응시요건으로 요구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산업안전보건지도사는 별도의 응시자격을 설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현장 경험이 전무한 사람도, 관련 학력이 없는 사람도 시험에 응시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응시자격이란 특정 자격 시험에 지원하기 위해 갖춰야 하는 최소 요건, 즉 학력·경력·관련 자격 보유 등의 조건을 의미합니다. 미국의 CSP(Certified Safety Professional), 일본의 노동안전컨설턴트처럼 비교 대상으로 거론되는 해외 제도들은 모두 이 응시자격을 엄격히 운용하고 있습니다.
2023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발표한 산업안전보건지도사 제도 발전방안 연구에 따르면, 응시자격 부재로 인해 자격 취득자 간 경력 편차가 매우 크게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되었습니다(출처: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심지어 취득자들 스스로 자신의 자격 수준을 기사와 산업기사 중간 정도로 평가했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이 정도면 '전문 지도사'라는 타이틀과 실제 역량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한 셈입니다.
건설안전기술사와의 관계, 제대로 이해하고 계십니까
제가 이 제도를 들여다보면서 가장 고개가 갸웃해진 지점은 건설안전기술사와의 관계였습니다. 건설안전기술사를 보유하면 산업안전보건지도사 2차 시험이 면제됩니다. 여기서 건설안전기술사란 수년간의 실무 경력과 고난도 필기·면접시험을 통과해야 취득할 수 있는 국가 최고 수준의 기술 자격을 의미합니다. 이 자격을 가진 사람에게 일부 시험을 면제해 준다는 것은 두 자격 간에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는 공식적인 인정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기술사 수준의 전문가에게 면제 혜택을 줄 정도라면 산업안전보건지도사가 기술사보다 더 높거나 최소한 동등한 수준이어야 논리적으로 맞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무 경력 없이도 시험서적만으로 합격할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제도입니다. 기술사 학원에서 지도사 시험을 병행해서 준비하라고 권장할 만큼 시험 범위도 겹칩니다. 제 경험상 이 구조는 두 자격의 위상을 모호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둘 다의 신뢰도를 갉아먹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산업안전보건지도사 제도를 설계한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도 관련 토론회에서 출제 위원의 전문성 부족과 함께 안전보건관리시스템, 안전심리, 안전문화 같은 현대 안전 관리의 핵심 개념들이 시험 과목에 반영되지 않고 있다고 직접 지적했습니다. 10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는 말이 뼈아프게 들립니다.
현장에서 직접 본 실무경력 공백의 현실
저는 현업에서 안전관리 업무를 하면서 지도사가 현장에 나오는 장면을 여러 번 봤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기대와 다른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서류상 위험요인과 실제 현장의 위험요인은 다를 수 있고, 공종 간 간섭이나 장비 동선, 작업 특성은 현장 경험 없이는 쉽게 파악이 안 됩니다.
여기서 공종 간 간섭이란 건설현장에서 서로 다른 작업(골조, 설비, 마감 등)이 동시에 진행될 때 발생하는 충돌과 위험 요인을 의미합니다. 이런 부분은 교과서에 없고, 현장을 발로 뛰어봐야 체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장 경험이 없는 지도사가 규정 문구를 그대로 읽어주는 수준의 지적을 반복하면, 현장 관계자들의 반응은 뻔합니다. "그냥 맞춰주고 끝내자." 제가 직접 옆에서 들은 말입니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면 역량 기반 평가(Competency-Based Assessment)의 필요성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역량 기반 평가란 단순한 지식 암기 여부가 아니라 실제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측정하는 평가 방식입니다. 현재 산업안전보건지도사 시험이 비판받는 핵심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역량 기반 평가가 취약하다는 점입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연구에서도 제시된 개편 방향의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2차 주관식 시험에 역량 기반 평가 방안 도입
- 3차 면접시험의 정합성 확보 및 채점 기준 명확화
- 현장 실무 경력을 바탕으로 3차 시험을 취득하는 방안 검토
- 안전보건관리시스템, 안전심리, 안전문화 등 최신 과목 반영
- 논술·면접 등 진단 및 지도조언 관련 과목의 난이도 상향
시험개편, 방향은 맞지만 핵심을 놓치면 안 된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이번에 시험제도 개편 연구 용역에 착수한 것 자체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오랫동안 지적되어온 문제들을 이제라도 정면으로 다루겠다는 신호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고용노동부 산하 공단이 공식적으로 움직임을 보인 만큼, 이번만큼은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길 기대합니다(출처: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다만 제가 우려하는 지점은 개편이 시험 난이도 조정이나 과목 추가 정도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제도 개편은 시험 내용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저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봅니다. 핵심은 실무 경력 요건의 도입입니다. 2차 합격 후 일정 기간 현장 실습을 거쳐 자격증을 부여하는 방식, 즉 실습 이수 후 자격 부여 체계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안전관리 분야에서 자격증은 목적이 아닙니다. 현장의 사고를 줄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 목적에 맞는 제도를 만들려면 시험지 위에서 검증되는 지식이 아니라, 현장에서 실제로 위험을 발견하고 개선할 수 있는 전문가를 걸러내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이번 개편 용역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직 지켜봐야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처럼 경력 없이 수험서적만으로 통과 가능한 구조가 계속된다면 현장 신뢰도는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현장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법률 또는 자격 취득 조언이 아님을 밝힙니다.
참고: https://www.safet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8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