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산업재해 사망자 수는 2023년 기준 598명입니다(출처: 고용노동부). 이 숫자를 처음 봤을 때 저는 단순한 통계로 읽히지 않았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안전관리 업무를 해온 사람으로서, 저 숫자 뒤에는 반드시 "막을 수 있었던 구조"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시스템 설계가 바뀌지 않으면 사고는 반복된다
사고가 나면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작업자가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 제가 현장을 다니면서 수도 없이 들었던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작업자가 왜 규정을 지킬 수 없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사회기술시스템(Sociotechnical System) 이론이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립니다. 사회기술시스템이란 기술과 인간 조직을 분리된 요소가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시스템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쉽게 말해, 아무리 좋은 안전장치를 설치해도 조직 문화와 의사결정 구조가 받쳐주지 않으면 그 장치는 현장에서 무력화된다는 것입니다. 저도 현장에서 그 장면을 직접 봤습니다. 방호장치가 설치된 기계에서 작업자가 장치를 임의로 해제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훨씬 잦습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생산 압박, 비현실적인 공정 일정, 관리자의 묵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여기서 심리적 안전(Psychological Safety)이라는 개념도 중요합니다. 심리적 안전이란 조직 구성원이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뜻합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에이미 에드먼슨(Amy C. Edmondson)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오류 보고가 많은 조직일수록 실제로 더 안전하다고 합니다(출처: Harvard Business School). 이게 처음엔 반직관적으로 들리지만, 곱씹어보면 당연합니다. 위험을 말할 수 있는 조직은 위험을 조기에 차단하고, 말할 수 없는 조직은 위험이 쌓이다가 사고로 터집니다.
제가 읽었던 일본전산 이야기라는 책에도 비슷한 맥락이 나옵니다. 나가모리 시게노부 회장이 기업을 회생시킨 방식은 사람을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시스템을 이길 수 없다는 것, 이건 안전 분야에서도 정확히 같은 원리입니다. 결함이 발견된 순간, 그 결함을 말한 사람이 보호받고 그 결함이 실제로 처리되는 구조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말하지 않게 되고, 사고는 반복됩니다.
현장에서 작업중지권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작업자는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작업을 멈추는 사람은 드뭅니다. 이 제도가 작동하려면 멈추는 행위가 불이익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로 인식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정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제 경험상 이 부분이 가장 바뀌기 어려운 지점이기도 합니다.
핵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안전장치는 설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조직 문화와 함께 작동해야 한다.
- 심리적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조직에서는 위험 신호가 차단된다.
- 작업중지권은 법으로 보장되어 있지만, 실제 작동 여부는 조직 문화에 달려 있다.
안전관리비 구조, 이제는 바꿀 때가 됐다
건설 현장에서 안전관리비(산업안전보건관리비)는 공사비에 일정 요율(비율)을 곱해서 산정합니다. 요율이란 공사비 대비 안전 예산의 비율을 의미하는데, 이 방식이 도입된 이후 약 10년간 요율이 동결되었다가 작년에야 평균 19% 인상됐습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는 말이 있지만, 그 사이에 자재비, 노무비, 물가는 모두 올랐습니다. 안전에 쓸 수 있는 돈만 제자리걸음을 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구조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요율 방식은 공사 규모가 크면 안전 예산도 자동으로 커지지만, 실제 위험 요소의 밀도와 비례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규모 현장이라고 위험이 적은 것이 아니고, 대규모 현장이라고 안전 예산이 항상 충분한 것도 아닙니다. 현장에서 가용할 수 있는 돈이 부족한 것, 이게 첫 번째 구조적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두 번째 문제는 문화입니다. 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법)이 시행된 이후로도 현장에서 "나는 괜찮다", "빨리빨리 끝내자"는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이란 중대산업재해 발생 시 사업주나 경영책임자를 형사처벌할 수 있도록 한 법률입니다. 처벌 규정이 강화되어도 실제로 사고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감각이 없습니다. 이건 개인을 탓하기 어렵고, 결국 시스템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요율 방식을 없애고, 설계 단계에서부터 안전 내역서를 공사 내역서 안에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일위대가(단위 공종당 표준 단가표)에 안전 시설물을 항목별로 넣어서 설계부터 반영하면, 설계 변경이나 공기 연장도 훨씬 자연스럽게 처리될 수 있습니다. 위험성평가(Risk Assessment)를 통해 특정 구간에서 안전 결함이 확인되었을 때, 그게 1구간 1번 계단이든 어디든, 그 결함을 처리하기 위해 공기가 늘어나고 비용이 증가하는 것이 적법하고 당연한 흐름으로 인정받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위험성평가란 작업 전에 잠재 위험 요소를 식별하고 그 위험을 줄이기 위한 대책을 수립하는 체계적인 과정을 말합니다. 이 구조가 만들어지면 작업자도, 관리자도, 발주자도 안전을 지키는 것이 부담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됩니다.
안전은 규정의 양이 아니라 그 규정이 실제로 작동하는 구조에서 나옵니다. 형식적인 매뉴얼을 두껍게 만드는 것보다, 현장에서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안전관리비 구조 개선, 설계 단계에서의 안전 내역화, 심리적 안전의 제도화,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움직여야 구조가 바뀝니다. 지금 당장 어렵더라도, 어디서부터 바꿔야 하는지는 분명합니다. 구조를 설계하는 사람들이 현장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들어야 할 시점입니다.
참고: https://www.safet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8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