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처음에 안전보건 목표와 경영방침을 세우는 게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방침 문서 하나 만들고, 목표 몇 줄 써넣으면 되는 거 아닌가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서 직접 적용해 보니 그 생각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제가 현장소장님을 보좌하면서 경영방침을 작성하고 근로자 의견 수렴 절차를 밟아보고 나서야, 이게 얼마나 많은 요소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작업인지 실감했습니다.
안전보건 경영방침, 법이 요구하는 것과 실제 구성 요소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제4조는 사업주와 경영책임자의 안전 및 보건 확보 의무를 규정하고, 그 이행 방식을 크게 9가지 항목으로 나눕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안전보건 목표와 경영방침의 설정입니다. 이 항목 하나만 보더라도 실제로 충족해야 할 세부 요소가 네 가지나 됩니다.
- 안전보건에 관한 경영방침 수립
- 안전보건 조직의 구성과 인원 및 역할 명확화
- 안전보건 관련 예산 및 시설 현황 편성
- 전년도 활동 실적 검토와 다음 연도 활동 계획 수립
여기서 안전보건관리체계란 기업이 스스로 사업장 내 위험 요인을 발굴하고 제거, 대체, 통제 방안을 마련해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구조적 시스템을 말합니다. 단순히 문서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스스로 찾고 고치는 사이클이 실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경영방침을 처음 작성할 때 가장 신경 쓴 부분은 길이와 구체성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방침 문서는 길고 상세할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반대라고 봅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길게 늘어놓으면 현장 근로자들이 기억하지 못합니다. CEO의 안전 의지를 짧고 명확하게 담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ISO45001과 관련해서도 짚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ISO45001이란 국제표준화기구(ISO)가 제정한 안전보건경영시스템 국제표준으로, 조직이 안전보건 리스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음을 인증하는 기준입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의 안전보건관리체계와 구조적으로 많이 겹치기 때문에, ISO45001을 이미 도입한 기업이라면 경영방침이나 목표 체계를 연계해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저도 실제로 이 부분을 참고해서 방침 초안을 잡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었습니다.
안전보건 예산 편성도 생각보다 중요한 요소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분이 필요합니다. 산업안전보건관리비란 건설업에서 발주자가 공사 원가에 계상하는 법정 비용으로, 법에서 정한 9가지 항목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대재해처벌법에서 말하는 안전보건 예산은 이것과 성격이 다릅니다. 경영책임자가 재해 예방을 위해 자체적으로 편성하고 집행 여부까지 확인해야 하는 투자 개념에 가깝습니다. 이 둘을 혼동하면 나중에 점검 항목에서 미흡 판정이 나올 수 있으니 반드시 구분해서 관리해야 합니다.
2024년 고용노동부 산업재해 현황 분석에 따르면 건설업 사망사고는 전체 산업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출처: 고용노동부). 수치만 보더라도 경영방침 수립이 단순한 서류 작업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건설현장에서 느낀 현실적인 괴리감
일반적으로 안전보건관리체계는 근로자 참여와 협의를 핵심 가치로 봅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현장 초기에는 직영반장 몇 명밖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분이 근로자 대표 역할까지 겸하게 되는데, 현장 위계 분위기에서 경영방침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기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의견 수렴 절차를 아무리 꼼꼼하게 진행해도, 결국 "이상 없습니다"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기서 SMART 기법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SMART 기법이란 목표 설정 시 Specific(구체적), Measurable(측정 가능), Achievable(달성 가능), Relevant(현실 적용 가능), Time-bound(시기적절)의 다섯 가지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목표 관리 방법론입니다. 이 기준을 안전보건 목표에 적용하면, "무재해 달성"처럼 막연한 목표보다 "고소 작업 추락 위험 구간 개선 조치 20건 이상"처럼 측정 가능한 형태로 설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도 KPI 지표를 참고해서 목표를 세웠는데, 처음에는 "사망자 제로 달성" 같은 최종 목표만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보다 누군가 알아서 하겠지 하는 분위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세부 활동 단위로 수치를 넣어 다시 작성했고, 그때서야 실제 이행 여부를 점검하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문제는 건설현장이 제조업처럼 고정된 환경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작업 장소가 매일 바뀌고, 협력업체도 공정마다 달라집니다. 노사협의체란 근로자와 사용자가 안전보건 문제를 공식적으로 협의하는 기구로, 상시 근로자 수에 따라 구성 방식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건설현장에서는 공정마다 인원이 교체되다 보니 이 구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조업 중심으로 설계된 기준을 건설업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법과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안전보건관리체계가 필요하다는 건 저도 압니다. 다만 위험성 평가나 근로자 참여 절차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려면 건설업 특성을 반영한 별도 기준이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히 짚어야 한다고 봅니다. 2023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발표한 연구에서도 건설업의 안전관리 실효성 제고를 위해 업종별 맞춤형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출처: 산업안전보건연구원).
경영방침 하나 잘 만들면 현장이 바뀔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서류 완성도보다 그 내용이 현장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만드는 과정이 훨씬 더 어렵고 중요했습니다. 경영방침은 방침이고, 현장은 현장이라는 간극을 좁히는 게 안전관리자의 진짜 일인 것 같습니다. 제도와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방법을 지금도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건설현장 안전관리 업무 중 겪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법률 또는 안전관리 전문 조언이 아닙니다. 실제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시에는 관련 전문가 또는 고용노동부 지침을 반드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