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여름, 제빙기가 분명 정상 작동 중인데 얼음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원인을 찾아보니 야외에 노출된 수도관 안의 물이 햇볕에 달궈져 있었던 겁니다. 제빙기에 뜨거운 물이 들어가고 있었으니 얼음이 만들어질 리가 없었죠. 이 작은 문제 하나가 근로자 전체의 냉수 공급을 끊어버린 셈이었습니다. 올해 혹서기 안전관리계획을 작성하면서 그 기억이 제일 먼저 떠올랐습니다.
산업안전보건관리비의 현실, 계획과 현장 사이의 간극
올해 7월 8일 서울 낮 최고기온은 37.1도를 기록했습니다. 7월 상순 기준으로 11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루 종일 혹서기 안전관리계획을 붙잡고 앉아 있으면서 가장 많이 떠올린 말은 "어디까지 가능할까"였습니다.
산업안전보건관리비(산안비)란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의 안전과 보건을 위해 법적으로 의무 편성해야 하는 비용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현장 안전에 쓰라고 공사비 안에 별도로 묶어둔 예산입니다. 문제는 이 산안비의 상당 부분이 안전관리자 인건비로 먼저 빠져나간다는 점입니다. 정작 근로자들이 피부로 느끼는 냉방시설, 얼음, 제빙기, 임시 휴게시설 같은 항목에 쓸 여유가 구조적으로 부족해집니다.
더 답답한 건 사용 방식의 제약입니다. 임시 근로자휴게실이나 제빙기는 대부분 임대 기준으로만 비용 처리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견적을 받아보니 어차피 매 여름마다 필요한 장비라면 구매가 오히려 저렴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기준이 임대라는 이유로 억지로 임대 견적을 받고, 위험성평가와 노사협의체 의결까지 거쳐야 합니다. 서류가 목적이 아니라 근로자 보호가 목적이어야 하는데, 행정 절차가 오히려 그 목적을 느리게 만드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2025년 2월부터 건설 현장의 산안비 한도와 사용 품목이 일부 확대 시행되었습니다. 임시 휴게시설 설치·해체·임대와 냉방기기 임대 비용은 기간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고, 온열질환 예방을 위해 노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품목의 사용 한도도 15%로 확대됐습니다(출처: 고용노동부). 개선된 건 맞지만, 저는 솔직히 이 정도로는 현장 체감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구조적인 비율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결국 한계는 비슷합니다.
이번 현장에서 제가 검토 중인 항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근로자휴게실 컨테이너 임대 견적 수령 및 기안 상신
- 제빙기 임대 및 수도관 햇빛 차단 조치 병행
- 냉감조끼 지급 대상을 우수 근로자 중심으로 선별 운영
- 작업 시간대 조정을 통한 폭염 집중 시간대(오후 2~5시) 옥외 작업 최소화
모든 걸 다 할 수 없으니 순서를 정해야 합니다. 현장에서 안전관리자는 예산의 한계 안에서 어떤 것이 근로자에게 가장 직접적인 효과를 주는지 판단해야 합니다. 저는 휴게시설과 냉수 공급이 그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온열질환 예방, 규정보다 현장 감각이 먼저입니다
2024년 8월, 폭염 경보가 발령된 날 학교 급식실 에어컨 설치 작업을 하던 근로자가 온열질환으로 사망했습니다. 같은 달 체감온도 35.3도의 야외에서 매립 측량 작업을 하던 근로자도 숨졌습니다. 두 사고 모두 2시간마다 20분 이상의 충분한 휴식과 증상 발생 시 즉각적인 119 신고가 이루어졌다면 막을 수 있었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올해 7월 17일부터는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이 시행되었습니다. 이 규칙은 사업주의 온열질환 예방 조치 사항을 구체적으로 의무화한 것으로, 폭염 작업 시 보건 조치의 법적 기준을 명확히 정한 것입니다. 폭염 작업이란 체감온도 31도 이상의 환경에서 2시간 이상 작업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말하며, 이 경우 냉방 장치나 통풍 장치, 또는 작업 시간대 조정 중 한 가지 이상을 반드시 실시해야 합니다.
체감온도(체감기온)란 기온과 습도, 풍속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해 사람이 실제로 느끼는 더위를 수치로 나타낸 것입니다. 단순 기온보다 실제 작업자가 받는 열부하를 훨씬 현실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폭염 작업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됩니다. 측정 위치는 근로자가 주로 일하는 장소의 바닥에서 1.2~1.5m 높이이며, 가장 수치가 높은 장소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체감온도 33도 이상이 되면 최소 2시간마다 20분 이상의 휴식을 부여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여건에 따라 1시간마다 10분 이상으로 분산 운영도 가능합니다. 열순응(heat acclimatization)이란 고온 환경에 반복 노출되면서 신체가 더위에 적응해 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최근 7년간 온열질환 산재 사망자 31명 중 80.6%인 25명이 작업 투입 후 7일 이내에 발생했다는 점은 이 열순응 여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출처: 고용노동부 산업안전보건공단). 신규 배치자나 만성질환자처럼 온열질환 민감군에 해당하는 근로자는 처음부터 풀 작업 시간을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시간을 늘려가는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제가 현장에서 직접 겪은 것처럼, 더위를 심하게 먹은 근로자에게 사실 특별한 묘책은 없습니다. 결국 시원한 곳에 눕히고 수분을 보충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막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두통, 어지러움, 근육 경련, 의식 저하 중 어느 하나라도 보이면 바로 119에 신고해야 합니다. 의심 단계에서 먼저 신고하는 것이 맞습니다. 확인하고 나서 신고하다가 골든타임을 놓치는 경우가 현장에서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폭염 대응은 결국 환경을 만드는 일입니다. 서류 한 장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제빙기에 차가운 물이 들어가는지, 그늘막이 실제로 쉴 수 있는 자리인지, 근로자가 눈치 보지 않고 쉬러 갈 수 있는 분위기인지까지 포함됩니다. 이번 여름, 계획서를 작성하는 시간보다 실제 현장을 점검하는 시간을 더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제도는 기준을 줄 수 있지만, 근로자가 버티는 환경은 현장에 있는 사람이 만들어야 합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법률 또는 안전관리 조언이 아닙니다.
사업장별 구체적인 조치 기준은 고용노동부의 '폭염 대비 온열질환 예방을 위한 사업장 대응 지침'을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